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실존한 회고록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미국내전(남북전쟁) 이전에 자유인이던 흑인이 납치되어서 노예로 팔려가고 12년 뒤에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전에도 ㅎ,흥미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 잊혀졌는데 최근에 CGV에서 재개봉을 한 것을 보고 생각나서 찾아보게 되었다.
미합중국에서 흑인의 삶은 단순하지 않은듯 하다. 노예로 칭하는 소유물과 멸시를 당하지만 자유인이 존재한다. 심지어 노예속에서 소유주의 마음을 얻어 지주의 아내로 노예를 부리는 자도 있다.
납치되어 끌려가는 배안의 여러흑인과 탈출을 모의하지만 그에 동조하는 자는 고작 셋뿐이다. 다른 이들은 노예의 삶 자체에서 벗어날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해서 자유를 얻은다고 해도 자유인인 주인공과 달리 나머지에게 기다리는건 최종적으로 죽음뿐일 것이다. 그나마 셋중 한명은 살해당하고 나머지 한명도 찾아온 원주인을 만나서 떠난다. 주인공은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애타게 부르짖지만 그는 돕지 않는다. 잔인한 장면이면서 시대가 처한 상황의 오싹함을 보여준다.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가는데 그나마 동정심이 있는 백인 농장주가 그를 매입한다. 주인공을 사면서 동시에 여자노예를 구입하는데 여자노예의 두 자녀중 최소한 한명이라도 같이 데리고 가려하지만 자본의 문제로 실패한다. 노예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는 인식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측은지심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사회구조를 바꾸려는 의사는 없고 노예는 재산이라고 여긴다. 이 거래장면에서 언급되는 가격이 상당했는데 노예가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북부에는 흑인 자유인을 위험을 감수하고 납치해서 노예로 판매한다는 것도 가격이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극히 소수의 남부 대지주만이 노예를 운영했을 것이고 절대 다수는 노예를 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 후에 노예제를 찬성하며 극단적으로 내전까지 치닫는다는 게 구성원이 가지는 사회적 인식의 집단성으로 봐야할까?
주인공은 농장주 사업에 도움을 주어 신뢰를 얻게 되지만 백인 관리인의 미움을 받고 일련의 상황이 발생하여 목매달려 살해당한뻔 한다. 이때 다른 관리인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하는데 정작 이 관리인도 목매달린 상태를 완전히 풀어주지는 않고 농장주를 부르러 간다. 주변에 수많은 노예들이 있지만 주인공을 풀어주지 않고 물을 먹여주기는 했다. 노예들이 주인공을 돕지 않는것은 관리인에게 대적할 수 없어서 일듯 한데, 도와주던 관리인이 주인공을 풀어주지 않은것은 일부러 그 상황을 농장주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인가 싶기도 하다. 농장주는 한참이 지나긴 했으나 허겁지겁 달려와 주인공을 풀어주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보호해준다. 싸웠던 백인이 어떻게든 죽이려 할 것이라 어쩔수 없이 주인공을 팔아야 한다며 비록 평판은 좋지 않지만 노예를 구하던 농장으로 가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때 주인공은 농장주에게 자신이 자유인인걸 알지 않느냐며 풀어달라고 하지만 농장주는 빚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살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목화농장주 아래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다가 캐나다에서 온 일꾼 중 노예폐지론자에게 고향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실제 주인공은 글을 읽고 쓸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의 숨통을 끊어놓게 될 것임을 알고 숨기고 지냈다. 고향에서 자유인 증명서를 가지고온 지인이 보안관을 대동하고 나타나 그를 구하면서 주인공은 십수년만에 가족가 재회한다. 영화 초반의 장면에서 처럼 그 역시 다른이들을 구하지는 못하고 혼자 떠나게 된다.
피부색에 의한 노예제는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피부색에 의한 구별속에서도 소유한 자본이 규정된 피부색을 뛰어넘고 개인의 양심(사회적 영향도 있음)을 짖누르는 모습.
그리고 학습된 무기력으로 항거하지 못하는 인간과 집단의 포악성은 지금도 유효한 모습이지 않은가.